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야 전술 (문단 편집) === [[후유증]]이 심각하다 === 청야 전술이라는 전술 자체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없애버리는 것이 기본인 만큼 전후의 피해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뒷일 생각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나 하기로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게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적군을 물리친 다음 재탈환과 재건에 들어가는 시간, 비용, 인력이 엄청나게 소모되며 그 결과도 신통치가 않다. 그리고 자국의 역량이 충실하지 않으면 청야 전술 쓰다가 같이 굶어죽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심하면 공격군이 소모되기도 전에 방어군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항복해야 하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 땅이 넓거나 험준하고 돌파하기 힘든 지형이 있거나 해서 청야 전술을 시행할 시간을 벌어 줄만한 상황이 아니면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전술이기도 해서 방어자가 엄청나게 불리한 경우가 아니라면 쉽게 사용할 수 없는 전술이다. [[오로벌하]] 시기에도 [[서하]]의 양태후가 이를 시도해 북송군을 좌절시켰으나 북송군의 [[영락성 전투]] 패배 뒤 서하의 경제적 피해가 가중되기도 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어설프게 시도하다가 [[남한산성]]에서 쫄쫄 굶고 항복한 후 [[삼전도의 굴욕]]을 겪는다. 이 경우에는 전술을 펼칠 시간도 없이 한양까지 신속하게 청군이 진격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청야 전술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 상황에서 인조가 시도해야 할 건 청야 전술 따위가 아니라 다른 왕족들과 함께 최대한 남쪽으로 도망침으로써 병자호란을 장기화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것을 유목과 농경을 동시에 하던 만주족이 모를리가 없어서 급속전진을 했고 이전의 전란 수준의 진격속도만 생각하던 인조가 반응을 늦게 한데다가 선조처럼 사태를 알자마자 전속력으로 도주하는 것도 못해서 결국 남한산성에서 포위당하게 되었으며 청야 전술이라도 쓸 수 밖에 없긴 했다. 하지만 청야 전술도 제대로 수행 못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당장 남한산성 외부에 있던 식량고에서 미처 성 안으로 식량을 운반하지 못해, 남한산성 안의 식량은 쌀 14,000여 섬, 간장 100여 독에 불과하였다. 군사 12,000여 명이 먹기에는 겨우 50여 일 분. 더구나 그해 병자년 겨울은 정말 추웠기 때문에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결국 '''포위된 지 고작 45일 만에 식량 결핍과 추위로 말미암아 성내의 장병은 방어할 기력을 거의 잃게 된다'''. 여기까지 가면 아군을 상대로 초토화 전술을 한 수준이다. 원칙대로라면 긴급상황에 대비해서 식량 창고가 반드시 성 안에 있어야 한다. 식량같은 무겁고 부피가 많이 나가는 품목을 유사시에 험준한 지형을 통과해서 성 안으로 제대로 들여놓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남한산성도 처음 축성될 때 성 안에 식량 창고가 있었다. 이렇게 잘 있던 식량 창고를 광주 목사 한명욱이 "험준한 산에 창고가 있으면 운반하는 백성들에게 민폐"라며 성 밖으로 끌어냈는데, 이것이 큰 실책이었다. 게다가 이것도 사실 운송을 담당한 상인과 야합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인조는 이런 걸 다시 재수정하지도 않았다. 본래 청군은 20일 정도 밖에 버틸 식량이 없었지만, 이 때 한강변에 떡하니 있는 식량 창고를 청군이 쉽게 노획한 후 제대로 활용해서 45일간 포위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줬으며, 오히려 남한산성 내부가 식량 부족을 겪었다. 원칙대로만 했어도 단순히 남한산성이 농성전으로 버티는 시간만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청군이 사용가능한 군량미를 대폭 줄여서 청군을 보다 힘겹게 했을 것이다. 식량 창고를 성 밖으로 빼내는 미친 짓거리를 할 지경이니 날씨에 대비한 각종 방한구가 있을 턱이 없었고 결국 [[진눈깨비]]가 내리자 인조가 "저 하나 죽는건 몰라도 백성들과 군사들이 뭔 죄가 있어 죽어야 합니까. 제발 날이 개게 하여 우리 신민을 살려주십시오 하늘이시여!" 라고 울먹이며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올리며 절해야 할 지경이었다. 아무런 대책도 안세웠고 도주도 못하는 무능한 국왕 그 자체였다. 무능하면 도망이라도 잘 가야 하는데 인조는 그걸 못했지만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중에서 적이 쳐들어오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국왕이 도주해서 승리한 전쟁이 바로 [[제2차 여요전쟁]]과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의 경우 당시 일본이 조선과 같은 농경국가였고 조선 왕만 쫓아간 게 아니라 일일이 조선의 각 지역을 점령해가며 북진했으며 조선을 멸망시키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조금 성격이 다르지만 일본군도 조선 국왕을 잡아서 조기에 항복을 받음으로서 빠른 전쟁종결을 원했기에 진격속도가 보병치고는 상당히 빨랐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제대로 대응책이 먹힌 경우다. 제2차 여요전쟁은 [[요나라]]의 [[거란]]족은 [[청나라]]의 [[만주족]]과 같은 기마민족이었고, 제2차 여요전쟁 당시에도 고려를 자국의 조공국으로 삼는 게 목적이었지 고려를 병탄하려는 건 아니었으며 그에 따라 당시에 고려 각지를 일일이 점령하지 않고 고려 왕을 신속히 추격했다는 점에서 병자호란 당시의 청나라와 비슷했기 때문에 대응책이 먹혔다. 청야 전술을 제대로 했더라도 후유증을 포함한 청야 전술의 단점이 실제로 이루어진 게 [[여몽전쟁]]기간. 강제로 산성이나 섬으로 옮기는데 백성들이 반발했고 이로 인해 중앙에서 대장군을 직접 파견 ~~이라 쓰고 진압이라 읽는다~~ 해야 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 재물을 불태우고 옮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문제는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비축해 놓은 식량까지 부족해 이동한 백성들의 80 ~ 90%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관리를 죽이고 몽골군에 자진 항복하는 경우도 많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